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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자도 사람이로세 2018-01-13 12:14:45

여자도 사람이로세      2010-04-26 1366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의 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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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첫째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

-나혜석의 ‘인형의 家’ 중 일부

 

2010년 4월 24일 제13회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이 경기도 여성비전센터 “나혜석홀”에서 열렸다. ‘여자도 사람입니다.’, ‘나의 삶이 걸작이 되고 싶어요!’라고 외쳤던 새천년 최초 문화 인물인 정월 나혜석(1896~1948)은 수원사람으로 그녀는 기존의 가부장적 굴레 속에 얽매여 있던 여성들의 해방과 권익회복 그리고 봉건질서와 인습파괴를 위해 온몸으로 대항하며 살다 간 선각자이자 여성해방론자이다.

한 ‘여성’이기보다 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당당한 여성 나혜석! 그녀는 근대 이혼 고백서 사건으로 그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고, 이광수의 ‘무정’보다 앞서 나왔다고 추정되는 소설 ‘경희’를 집필한 당대를 대표하는 여성소설가이자 시인이며,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3.1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른 독립 운동가였다. 1913년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유학생 동인지『학지광』에 근대여권을 주장하는 ‘현부양부의 교육법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현모양처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의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녀는 어려서부터 남녀가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어렵게 살게 된 원인 제공자인 최린이 힘들어하는 자신을 모른 척하는 것은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불평등이었다. 아니 파렴치한 일이었다.

1920년대 문인 중 가장 논리 정연한 이론을 갖춘 한국 최초 여성칼럼니스트이며 여성 해방문학에 대한 자의식을 가진 그녀가 작가로서 주목받은 것은 1918년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가는 과정을 담은 중편소설 <경희>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가 발표한 문학작품 곳곳에는 여성선각자로서 계몽주의사상과 여성도 인간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여성의 인간회복을 선언하는 페미니즘적 의식이 녹아 있다. 그러한 그녀는 천재성을 가진 예술적 재능과 진보적인 의식을 가졌음에도 문단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이었던 시대에 자유연애와 이혼 등 문란한 사생활로 말미암아 상징적인 자유여성으로 부각되어졌기 때문이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여 아내이자 화가로, 작가와 세 아이의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나혜석은 자신의 그림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등 깊은 슬럼프에 빠져 네 가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1927년 3년간 세계 일주여행을 떠났다.

네 가지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가?’, ‘남녀 간에는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여자의 지위란 어떤 것인가’,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였다. 세계 일주 여행을 통해 그녀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것은 결국 그녀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여행 중 서구여성들의 좀 더 인간적인 생활과 새로운 그림에 눈뜨면서 함께 예술을 논했던 남편의 절친이자 천도교 신파의 우두머리였던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 일로 남편과 이혼하는 등 위기를 맞은 그녀는 더 왕성하게 그림과 글쓰기 활동을 했지만 최린의 배반으로

다시 방황했고 결국 1946년 길거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에 예술을 추구하다 이혼당하고 빈 몸으로 쫓겨났으며 그녀를 파멸로 몰고 간 두 남자가 멀쩡히 행사하는 사회관습에 도전하여 전시회를 열었지만 조선사회의 반응은 싸늘했고 그 냉대 속에서 그녀는 병들어갔다. 아이들조차 보지 못하게 하자 그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양로원에 맡겨졌지만 아이들이 보고 싶어 걸핏하면 빠져나오곤 했다.

나혜석의 말년을 옥죈 것은 결국 그녀의 이혼사건이었다. 그녀는 당시 대표 월간지 <삼천리 1934년 9월호>에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한다.”는 내용의 「이혼고백서」를 실었다. 이 내용은 세상을 발칵 뒤집히게 했다. 그것은 조선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녀가 주장했던 것은 여성의 권리다. 천재 예술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나혜석을 행려병자로 죽게 한 것은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이어서 배제되고 여성이어서 안 된다는 등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은 여기저기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완전히 사라져야 이 시대의 여성들이 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혜석은 보수적 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녀가 남긴 생각과 그림과 글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의 삶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문학적, 미술적 재능과 시대를 앞서간 미래지향적 사고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이 모여 1995년 나혜석 기념 사업회를 만들고 해마다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 및 ‘나혜석 미술대전’을 여는 것이다. 현재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나혜석 거리가 조성되었고 그녀의 동상도 세워졌다. 2009년에 발행된 5만 원권 고액권 지폐에 들어갈 인물 후보로 ‘나혜석’ 이 추천되었었다. 이것은 나혜석에 대한 재조명으로서 문학계나 미술계를 위해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문학계와 미술계 문화계는 물론 이제는 일반인들까지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한다. 이렇게 나혜석에 관심 두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을 보며 나혜석의 뛰어난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다. 나혜석 재조명을 통해 양성평등이 하루빨리 자리 잡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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