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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께서 말문을 닫으셨다 2018-01-14 16:07:31

아버지께서 말문을 닫으셨다        2012-05-08 1129

올해 79세이신 아버지께서 말문을 닫으셨다.

구정에 부모님을 뵙고 그 후 집으로 전화를 걸면 아버지는 주무신다든가 외출하셨다고 하여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한참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중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말을 안하신지가 한참 되었다는 이야기를 흘리셨다. 알린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기에 알리지 않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꼭 필요한 말만 하실 만큼 말이 많지 않은 분이셨지만 말을 안 하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으므로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머니는 말을 하지도 않지만 질문을 해도 묵묵부답일 때가 있으며 친구 분들과 만나도 표정 없이 앉아계시다 오신다고 하셨다. 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치매 초기단계라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통화를 끝내고 아버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또렷한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하셨다. 아버지와 10여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딸이 걱정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아무 일 없는데 너희 애미가 예민해져서 그러는구나.”라고 하시며 도리어 어머니의 건강을 더 걱정하셨다.

아버지와 통화를 마친 후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하고 그 주 토요일 아침 일찍 남편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 갔다. 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무척 반가워하셨다. 남편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낙 깔끔하신 어머니는 어쩌다 급한 나머지 속옷을 적신 아버지를 조금 닦달했는데 그 때부터 그런 증세가 나타난 것 같다고 하셨다. 그것은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하시고 남에게 피해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그런 일 생기기 전에 가야한다고 생각하셨던 분이었던 만큼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이 들면 다 그런 과정을 겪는 거 아니냐고 위로했다지만 당신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의기소침해지신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사위와 딸과의 대화가 조금은 위안이 되셨는지 일찍 주무시는 평소의 룰을 깨고 늦게까지 함께 계셨고 월요일 출근을 위해 떠나올 준비를 하자 벌써 가느냐고 아쉬워하셨다. 앞으로 어머니께서 많이 힘드실 텐데 그 땐 제가 며칠이라도 모실 테니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약물 치료와 함께 규칙적으로 운동을 함께 하고 치매를 예방하는 식단을 실행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시며 며칠 전 5부작으로 상영되었던 아내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후회 없이 사랑하고, 아내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소원인 할아버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인간극장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3년 전, 나이 쉰일곱에 ‘초로기치매’ 판정을 받은 할머니를 13년째 돌보는 할아버지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여러 번의 사업 실패로 인한 마음고생이 아내를 병들게 한 것 같아 그 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내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인간극장 이야기를 하시며 지금 네 아버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내라는 사실만으로도 어미는 감사하게 생각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한 발 뒤에 서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약물치료와 함께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간호가 아버지의 초기치매 증상을 완화시켜주거나 좋아지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바로 인간극장 5부작을 모두 다운받았다. 하루 30분 햇볕 쬐기, 산책하기, 약 먹이기는 물론 세 시간마다 시간과 장소 불문하고 대소변을 챙겨주면서도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할아버지는 세 살 지능이 된 아내가 사랑스러워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 이야기였다. 한 두 해도 아닌 13년 동안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간병해왔다는 것은 대단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존경스러웠다. 부모님을 뵙고 ‘인간극장’ 이야기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것과 나이 들고 병들었을 때 자식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배우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치매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 이야기이고 내 이야기이다. 가정의 달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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