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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상으로 보내는 편지 2018-01-06 22:44:26

2007-05-22 1361

천상으로 보내는 편지!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전시회가 안산 예술의 전당에서 5월말까지 전시된다. 행사 셋째 날,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들렸다. 안내자 한 분만이 맞이하고 있었다. 사람의 체온이나 발길이 느껴지지 않는 적막한 기운을 느끼며 시화전을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너무도 생생히 천진스럽게 웃고 계신 살아생전에 뵈었던 그 모습 그대로의 천상병 시인을 만났다. 천시인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전시장은 그날의 마감시간이었다 치더라도 홍보가 잘 되지 않았음이 느껴져 너무도 썰렁했다. 찾는 이가 많지 않다는 안내인의 말에 천시인을 돌아보며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천시인의 천진난만한 웃음은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라며 도리어 위로해주고 있었다.

일본에서 출생한 천상병 시인은 해방되던 해(1945년) 가족과 함께 귀국해 1949년 월간 ‘문예’지에 “강물”을 실었다. 그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에 있을 때 대학 시절 친구의 수첩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동백림 간첩사건 연류자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그리고 갖은 고문을 받아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로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1971년 실종되고 말았다. 결국 천시인은 죽은 것으로 결론지어졌고 친구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모아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러나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서울의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이다. 유고시집이 그를 찾아냈고 그는 살아서 자신의 유고시집을 보는 특권을 누렸다. 심한 고문으로 깊은 자폐증상을 보이던 그 때, 그냥 방치해 두면 안 될 것 같고, 자기가 아니면 아무도 나설 사람이 없을 것 같다며 보호자로 나선 천사가 있었다. 그분은 지금도 인사동 ‘귀천’에 가면 뵐 수 있는 문순옥 여사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기인이라 불렸던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천상병 예술제가 매년 4월이면 의정부에서 열린다. 의정부는 천상병 시인이 세상 떠나기 전 10여년을 의정부에서 살았던 것을 기린다. 그는 커피 한 잔과 브람스교향곡 4번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12시에 손칼국수를 먹고 캔맥주나 실비집 막걸리 한 잔이면 족했다. 시는 하루 중 언제라도 제목을 정해 머릿속에 정리되면 “빨리 원고지 줘”라고 했고 즉석에서 쓰고는 “됐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지인을 만나면 500원만 내라고 했는데 1,000원을 주면 거스름돈을 주고, 수난과 방황의 연속이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 주는 돈은 절대 받지 않았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 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중략——-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새여 너는/낡은 목청을 뽑아라/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 일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중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일부-

이 세상 소풍은 끝냈지만 늘 우리 곁에 살아있는 순수시인! 그의 작품세계의 원천은 어둡고 암담했던 삶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긍정적인 삶을 표현해낸 현실 인식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섬세하고 거의 신비적이다. 동백림 사건 이후 그의 시 세계는 죽음 저편을 바라보는 초월의식과 함께 어린아이 같은 동심의 세계로 나아갔다. 아기 같이 순수하게 욕심 없이 산 시인을 다시 만나고 나니 욕심 부릴 일 하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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