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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히로시마 일기-1 2018-01-07 17:46:43

히로시히로마 일기-1히로시마 일기 2008-04-13 1403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1945년 8월6일, 공습경보가 해제되어 시민들이 대부분 방공호 밖으로 나온 상황, 미국은 전쟁 조기 종결이라는 명분아래 사전경고도 없이 히로시마도심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에 히로시마 전체가 파괴 전소되었으며 인구 35만 명중 14만 명이 즉사하고, 7만 여명이 방사능으로 숨졌으며,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아직까지 원폭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이후 일본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히로시마에 평화공원을 만들어 관광지로 조성했으며 도시를 세계 평화의 상징으로 만들어 원폭에 대한 경각심을 세계에 알리고 평화에 대한 염원을 기도하고 있다. 과연 그들이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들은 가장 이웃나라인 우리에게 그토록 물불 가리지않고 침략을 하고서 반성은 커녕 아직도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우리나라와의 감정 대립을 일삼고 있다.

히로시마공원에는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침략행위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고 전대미문의‘원폭투하의 피해자’라는 의식만으로 오로지 원자폭탄에 대한 처참함과 평화에 대한 갈망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을 징용으로 끌고 갔고 노예와 같은 생활을 시켰다. 원폭 당시 희생자 7만 명중 1/10인 7천여 명이 한국인이었다. 한국인 위령비를 찾아 한참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히로시마 문화유적 탐방을 통해 애국심을 갖게 된 것으로도 큰 소득이었으며 여행을 통해 열린 마음과 변화와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4월 1일 오전.

벚꽃 축제가 한창인 봄날 오늘따라 유난히 화창하다.

히로시마에 연고가 있어 미리 와있었던 관계로 오전 9시 30분 함께 여행할 친구를 히로시마 역에서 맞았다. 이국에서 보는 반가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와의 히로시마 문화유적 여행을 위해 밤늦도록 히로시마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히로시마 시내관광은 마음먹기에 따라 하루에 모두 끝낼 수 있지만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기 위해 2박3일 중 2일의 일정을 잡았다.

<슉케이엔>

일정 첫 방문지는 슉케이엔이다. 슉메이엔을 첫 일정으로 잡은 것은 히로시마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기도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줄곧 이어지는 관광구성에 맞춘것이기도 하다.

히로시마역에서 슉케이엔으로 걸음을 옮기며

「히로시마는 최고의 군사도시였으며 학문과 상업 그리고 경제로 일본에서 알아주는 도시였으나 1945년8월 원자폭탄 투하로 히로시마는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그러나 평화재건 목적으로 도시개발을 추진하여 현재 히로시마는 국제문화 평화의 도시로 거듭나는 감동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원인제공은 정작 일본이 하였다.」라는 메모지를 친구에게 전했다.

히로시마 역에서 약 15분 정도를 걸어가자 히로시마 명승지인 슉케이엔에 당도했다. 슉케이엔은 1620년 히로시마의 지방영주인 아사노가 중국의 서호를 일본식으로 축소시켜 만든 매우 아름다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이다. 매화와 벚꽃나무, 철쭉의 명소라는 것을 자랑하듯 잠에서 막 깨어난 순수함을 머금은 매화와 벚꽃이 우리를 반겼다. 정원 중앙 연못에는 크고 작은 10여개의 아름다운 섬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고 연목 주변에는 산과 계곡, 다리, 정자 등이 교묘히 어우러져 있었다. 연목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도록 산책로를 만들고 각각 다양한 변화를 주어 실제 면적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슉케이엔을 둘러본 친구는

“일본인들의 근성이 묻어나는 곳이다. 어떻게 생각하니 넌?”하고 물었다.

“그래, 이들의 정교함과 내일이 아닌 먼 훗날을 내다보는 장인정신이 묻어남을 느끼게 되는 군. 흐음……” 나의 감탄이 너무도 컸던터라 “흐음…….”하고 말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현립미술관>

우리는 슉케이엔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바로 앞에 위치한 현립미술관을 향했다. 현립미술관은 확 트인 광장 같은 공간을 모티브로 1968년 개관된 살바도르 달리의 <비너스의 꿈>과 히라야마 이쿠오의 경이적인 작품을 전시한 도시형 미술관이다. 4000여점의 작품뿐 아니라 미술 관련 서적과 하이 비젼 소프트의 콘텐츠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시대별로 유행했던 작품들이 어떤 유파였는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품에 대한 조애가 깊은 친구가 미술품에 대해 보충 설명을 했다. 친구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는 나를 신기한 듯 뚫어져라 쳐다보던 친구는

“너, 진지한 걸 보니 네게 미적 감각이 숨어 있었나보다. 오늘부터 개발해보는 게 어때?”

“아, 무슨……” 손 사레를 쳤지만 친구 덕분에 정말 ‘미술을 해볼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미술관에서 2시간가량 시간이 지났다. 미술관을 나오자 바로 앞으로 노면전차가 지나갔다.

“어! 전차네? 신기하다. 도시에 전차가 다니다니…….전차는 낭만이 느껴진단 말이야.”

“모레, 미야지마 관광 갈 때 타게 될 거야.”

우리나라 60년대에 있었던 전차가 현대화 도시로 변모한 히로시마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다닌다는 것이 부조화인 듯 조화로웠다. 그것은 첨단을 달리는 과학의 시대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또 다른 부조화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일본인들의 국민성 때문이라 생각된다. 전차 이야기가 나오자 일본인들에게서 배울 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인의 검소함과 질서의식에 대한 이야기다. 그 예로 다시 전차이야기를 해본다. 같은 노선을 다니는 차량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노후 된 차량이 있는가하면 최첨단 미래형인 차량까지 같은 도로를 사이좋게 다니기 때문이다. 공공시설에서 나타나는 검소함을 보면 공직자들부터 검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가지 않는 돈은 함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 새롭게 탄생한 정부로 인해 한 부처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구입한 아직 새것과 다름없는 집기들을 양심도 없이 부처 건물 앞에 버렸다가 국민들의 눈총을 받았다. 우리국민들이 배워야할 부분이다. 우리 국민성은 오랜 핍박 때문인지 겉치레나 허영심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므로 일본인의 검소함과 어디서나 잘 지키는 질서의식은 우리가 배워야할 일본인의 덕목이라는 생각에 일치를 보았다.

4월 1일 오후

<히로시마성> 히로시마성은 한국인으로서 약간 거부감이 가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악명 높은 토요토미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모모야마시대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히로시마성은 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전략인 인공연못으로 둘러싸여 매우 인상적이었다. 1589년 축조되어 1958년에 재건되었으며 히로시마 역사를 전하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945년8월6일 원자폭탄에 건물이 붕괴되고 아성의 망루만 남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인 모리 테루모또가 세웠다는 것에 한국인으로서 기분이 나빠져 우리는 서둘러 히로시마성을 나왔다. 성당을 다니는 친구를 위해 세계평화기념 성당도 방문했다. 1954년에 건립된 것인데 원폭을 당한 휴고럿셀 신부가 로마교황을 비롯한 세계 각지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지어졌다고 한다.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 마치고 히로시마의 번화가인 가미야초와 혼도리에서 쇼핑과 맛 집 기행을 하며 히로시마의 오코노미야키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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