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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화 속의 운명론 - 문화칼럼 2018-01-05 01:52:39

2006.04.26      조회   1349

오이디푸스”와 “햄릿”과 “까르마조프 형제들” -문화칼럼 기고

가끔씩 뉴스에 등장하는 근친상간이나 근친상해, 패륜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기에 더욱 크게 부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미래시대를 겨냥하여 이해시키려한 것인지 이미 신화 속에서 운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되어 왔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모든 것들이 과연 운명이라고 보아야하는가에 대하여서 생각한다면 그들을 유죄다 무죄다 논할 수 없지 않은가 싶어 오이디푸스나 햄릿 그리고 까르마조프 형제의 이야기로 그들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벽에 부딪혀 생부를 죽이고, 생모를 차지하며 동시에 자식을 생산한다. 피한다고 피한 것이 더욱 운명적으로 가까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햄릿은 부왕의 죽음 이후 곧바로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숙부에게 살해당했다는 부왕의 망령이 들려준 이야기로 가혹한 고통을 겪으며 견디기 어려운 심적 갈등을 가져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고뇌하고 처절해 했던 것이라고 본다. 까르마조프 형제들은 장남 드미트리가 선술집과 고리대금업 등 좋지 못한 사업으로 돈을 번 물욕과 성욕의 소유자이며 또한 냉소적인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형을 받는 것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살해와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은 과연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죄를 논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운명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었으며 피해가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만난 노인이 생부였음을 어떻게 알 것이며 그 다음 운명적인 각본을 인간으로서 어찌 피해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작품을 보면 철저한 운명에 입각하여 인간의 힘을 초월한 운명의 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실감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애써보지만 결국 그의 삶을 조종한 것은 거대한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살다 보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닥뜨리게 되기도 하고 지나고 보면 잘 모면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함을 체험한다. 사회적으로 성공 했다는 사람들은 때로 “운명은 개척할 수 있다고 또는 방향전환이 가능하다”라고 호언장담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이다. 개척했다 라는 것 또한 운명적인 몫이 아닐까 한다. 과연 운명은 정해져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 정해진 운명대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나름대로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며 스스로의 삶은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대가가 주어지리라고 믿었다. 그렇다! 노력했을 때에는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반드시 주어진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 죽고 사는 생사문제, 빈부의 문제 등, 도저히 개개인의 운명적인 몫이라는 관계 앞에서는 한계가 반드시 있음을, 노력이나 피하려하는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사건들을 목격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미리 알게 된 운명의 계획을 피해가려는 의지를 보인, 운명과 의지와의 관계, 신의 권위와 인간 독존의 역학 관계, 그러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벽에 부딪혀 비윤리적, 비도덕적 인물로 묘사되었다. 인간으로서 어찌 할 수 없는 운명적인 부분을 이겨낼 수 없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피해보려고 저항하는 오이디푸스의 역할은 니체가 말하는 시지프스적 죽음의 저항을 그치지 않는 인물의 한 전형이 아닐까 한다. 다만 운명의 엄청난 힘 앞에서는 무력한 인간의 한계가 드러나지만 적어도 그대로 무릎을 꿇는 것보다는 인간의 의지라는 지혜로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 보아야하지 않을까 하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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