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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다림의 미학 2018-01-06 22:47:49

2007-06-05 1409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린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신랑은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을 누고는 그만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곁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 그대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님의 ‘신부’ 전문 –

이 시는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인해 신부가 4-50년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어야했고 기다리던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비극적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신비주의적 내용에 다분히 관능적인 소재로 읽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재가 되어버리는 신부의 비극으로 인해 그저 웃어버릴 수만 없게 만드는 해학이 깃든 여인의 정절이 주제인 작품이다. 필자는 기다림이라는 주제도 잘 어울 릴 것 같다 생각하는데 이는 과학적인 발전이 거듭될수록 감성적인 부분은 점점 더 메마르고 조급해져 기다림의 느긋하고 애틋한 미학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 시대는 사랑이나 의사표현에 있어서 싫고 좋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여 아니라면 빠르게 정리하고 다른 것을 모색해 나가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는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는 것은 역시 좋지 않다고 본다. 이에 과거의 기다림과 크게 대비되는 현 시대를 잘 반영한 현대의 기다림을 비교해 본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 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소 싸움이 아름다운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살피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 안도현님의 ‘기다림’ 전문

두 시의 공통점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한 재회의 의지와 소망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완연히 다른 점은 과거 기다림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면서도 여인의 인고와 숭고한 정절의 모습으로 승화된 기다림이라 한다면 현대의 기다림은 요즘 젊은이들을 그대로 반영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기다림의 자세라 할 것이다. 긴박감까지 느껴진다. 굳이 1975년에 실렸던 작품과 현대작품을 비교해보는 것은 편리한 생활과 함께 수없이 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이느라 감성적 능력의 자리는 비좁아지고 있어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억력 감소까지 가져와 디지털 치매란 신조어가 나올 만큼 심각한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므로 한 번 쯤 마음을 정화하는 의미에서 미련떨기 같은 기다림의 미학이란 감성적인 방을 만들어 마음과 머리를 쉬어가게 하는 방법이 절실한 때라 여겨 두 시를 비교하며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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