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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적한 오후다 2018-01-06 22:37:31

2007-04-18 1208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 본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제자의 손에 손톱으로 시를 남겼다. 66세를 일기로 별세한 시인 오규원 선생님! 목숨을 다하면서도 끝까지 시를 놓지 않았던 선생님 소식은 슬픔보다 아름다움이라 표현하고 싶다. 글씨를 직접 쓸 수 없어 병상에서도 휴대전화 문자로 하루 한 행씩 시를 쓰셨다고 한다. 평소 화장해 뿌려달라고 늘 말씀하셨고 수목장으로 강화도에 있는 전등사의 한 나무 밑에 묻히셨다. 시에서 밝힌 것처럼 나무속에서 영원한 잠이 드셨다. 오규원 선생님께서는 1991년부터 만성폐쇄성폐질환이란 희귀병을 앓으셨다. 허파가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기능을 잃어 인간이 누리는 산소의 20%만으로 살아야 하는 병으로 강원도 인제와 무릉, 경기도 양평 등 공기 맑은 곳에서 숨을 아껴가며 시를 써 오시다가 올해 1월 병원에 입원하셨다.

시인 오규원 선생님은 한국 시단에서 언어 탐구의 거목이었다. 초기 시에서부터 ‘추상의 나뭇가지에 살고 있는 언어’를 탐구했고 결국 나무 아래에 묻혀 영면을 취한다. 고인은 한글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한국 시사에서 오규원이란 이름 자체로 하나의 계보였다. 그것은 평생토록 쌓은 시 작업에서의 ‘날 이미지의 시론’ 때문이다. 주체중심,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그 관념을 생산하는 수사법도 배제한, 살아 있는 이미지들을 시에 구현하는 것, 그것이 날[生]이미지 시이다. 인간의 관념이나 수사 따위로 오염되기 이전,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추구했다. ‘날 이미지는 의미를 비운다.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그러나 걱정마라. 언어의 밑바닥은 무의미가 아니라 존재이다. 내가 찾는 의미는 그곳에 있다’고 고인은 자신의 시 철학을 명쾌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밤새 쓴 습작원고에 시뻘건 줄 죽죽 그으며 “시가 되지 않는 것은 버려라” 호통 쳤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고 나면 선생님은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오규원 선생님을 각별히 기억하게 된 것은 강화도 시인이라 불리는 함민복 시인 덕분이다. 집안이 어려워 공장에서 학비를 번 뒤 늦깎이로 굳이 서울예대를 선택한 까닭을 오규원 선생이 계셔서라고 답하는 함민복 시인으로 인해 오규원 선생님의 글을 더 많이 접하게 되었다. 오규원 선생님은 떠돌이 시인이 정착한 바로 그 섬에 묻히셨다. 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시던 오로지 날 이미지 시에 몰두하셨던 선생님의 생애는 내내 외로웠다 할 수 있다. 17년을 투병해야 했고, 문단의 사대부적 구조와 문학 권력을 비판했던 단호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인의 마지막 길에는 수없이 혼나던 많은 제자들이 함께했다. 죽음 뒤에야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고 했던가. 돌아가시고 난 뒤 詩와 관련된 문학잡지들은 모두 오규원 선생님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사람들은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수많은 일화들을 기억해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시인들의 시를 절명시라고 한다. 선생님이 남긴 4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초월적인 미학이 담겨 있다. 오규원 선생님 뿐 아닌 많은 시인들이 남긴 절명시는 하나같이 명시들이다. 죽음을 앞둔 시인들의 감성이 극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고 목숨을 다하면서까지 시인으로서 시를 쓰고파하는 정신은 명시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리다. 이형기 시인이 남긴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 시작하는 절명시처럼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숭고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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