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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이 푸르른 날은 2018-01-06 21:03:59

2006-10-24   1026

지난 일요일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비 내린 후 기온이 떨어질 것이라는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다음날은 겨울외투가 생각날만큼 쌀쌀해졌다. 그리고 더 높아진 하늘은 한층 더 푸르게 변해 있었다. 하늘이 높고 푸르러지면 오래전 허영자 교수님께서 강의도중에 들려주셨던 이야기 한도막이 생각난다. 허영자 교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한 치 흐트러짐이 없으신 모습으로 강의에서나 본래의 성품에서나 배울 점이 참으로 많은 분으로서 그분 곁에 앉았다 일어서면 그분을 어느새 닮아가고 있음에 내심 뿌듯해져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안가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긴 하지만 그 당시만으로도 흐뭇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나면 부러울 것이 없어진다.

“내 강의를 듣던 한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학생은 중학교 1학년 시절 자신에게 무척 친절했던 나이차이가 제법 나는 대학생 언니를 무척 따랐는데 그 언니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다 배려해주면서도 항상 책상서랍 하나는 꼭 잠그고 다녔습니다. 너무도 궁금해 하던 어느 날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철저한 언니가 그날따라 책상서랍을 잠그지 않고 나갔던 것입니다. 떨리고 흥분된 손길로 서랍을 열어보았는데 그 속에는 예쁜 노트가 들어있었습니다. 일기장이었습니다.‘에이 별거 아니잖아’하면서도 호기심에 일기장을 펼쳐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언니는 그 여학생이 보기에 시인이었습니다. 많은 시들과 언니의 생각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그 여학생의 눈길을 끄는 시 한편이 있었습니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막 사춘기에 접어든 그 여학생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언니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단 말인가’하면서 언니를 존경하기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몰래 언니의 시라고 생각되는 구절을 베꼈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이 너무도 아름다워 외우고 다니다가 어느 날 국어수업시간에 시 한 편을 써 내는 과제에 외우고 있던 그 시를 써서 자신 있게 냈다고 합니다. 국어선생님은 아무말씀 없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서정주님의 시집 한 권을 주셨고 그 여학생은 그 시가 서정주님의 ‘푸르른 날’이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고 한동안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javascript:;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며 고백을 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이같이 강의 중에도 잔잔한 사람들 이야기 한 도막으로 감성을 불러 일으키셨던 교수님이 가을이 되면 가까이 계신데도 문득 그리워진다. 가을은 누군가 남성의 계절이 아니라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는 계절이라고도 했던 말에 공감이 간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거나 무엇을 받아서 행복한 것이 아닌 그저 곁에 있어주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가을날 한해를 돌아보기 전에 누려도 될만한 사치가 아닌가한다. 그러면서 필자 또한 누군가에게 그리움을 줄 수 있는가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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